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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칭기즈칸 - 리그니츠 전투1

loop 2007. 7. 1. 15:32

 

칭기즈칸 / 리그니츠 전투1

 

(칭기즈칸 동전: 1220년대 것으로 추정되는데 아프가니스탄 지역에 발굴되었다)

 

몽골군의 정복전쟁은 크게 보면 다음의 세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1) 중국과 주변지역 평정, 2) 호라즘제국을 위시한 이슬람세계 정복, 그리고 3) 러시아와 지금의 동유럽지역 정복

여기에서 서유럽이 빠지는데 이 부분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몽골군의 동유럽 정복전쟁의 하이라이트였던 리그니츠 전투를 끝으로 종결된다.

 

징기즈칸은 호라즘제국 원정길에 4명의 아들을 동행하는데 

 

장남 - 주치

2남 - 차가타이

3남 ? 오고타이

4남 ? 투루이

 

칭기즈칸은 정복전쟁이 끝난 후 점령지를 함께 원정을 했던 네 아들에게 분배하게 된다. 

칭기즈칸의 사후 몽골제국이 어떻게 변화해 갔는지를 알기 위해 귀찮더라도 가계도를 한 번 이해할 필요가 있다. 

 

1. 주치 (Juchi, 朮赤) - 지금의 러시아 지역 --> 이후 킵차크칸국

             바투 (Batu)

 

2. 차가타이 (Chagatai) - 지금의 중앙아시아 지역 --> 이후 차가타이칸국

 

3. 오고타이 (Ogotai 혹은 Obedei) - 지금의 몽골고원 일대 --> 이후 오고타이칸국

             구유크 (Guyuk 貴由) ? 카이두 (Khaidu)

 

4. 툴루이 (Tului) - 칭기즈칸과 함께 몽골 중부 통치

             1) 몽케 (Monke 蒙哥), 2) 쿠빌라이 (Kubilai 忽必烈), 3) 훌라구 (Hulagu), 4) 아리구

 

 이상의 계보를 기억하면 다음 이야기들이 더 쉽게 머리속에 들어온다.

 

그리고 칭기즈칸의 동생들에게는 만주 지역을 할당하고 남쪽의 농경지대는 일족의 공유재산을 삼았다.

 

칭기즈칸은 넓혀진 제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 제국의 기반을 닦는데 그것은 자신의 후계자를 미리 선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칭기즈칸 이후 몽골제국의 황제를 일컫는 카칸(Khakhan, or "Khan of Khans" 大汗)의 계보는 다음과 같다. 위의 계보가 그대로 오는 것이 아니라 약간 얽히고 �히는 경향이 있고  우리와도 관계가 있으니 초대부터 5대까지만 알아보자. 

 

1대 ? 칭기즈칸

2대 ? 오고타이 칸 太宗 (칭기즈칸 3남)

3대 ? 구유크 칸 定宗 (2대 칸 오고타이 장남)

4대 ? 몽케 칸 憲宗 (칭기즈칸의 4남 툴루이 장남)

5대 ? 쿠빌라이 칸 元 世朝 (칭기즈칸의 4남 툴루이 둘째)

 

약 200년간 존속한 몽골제국은 5대 쿠빌라이칸 때에 극성기를 이루는데 동유럽원정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칭기즈칸 사후 2대에서 5대 칸에 이르는 역사를 간략하게 정리해보자. 

칭기즈칸이 세계정복의 토대를 닦았다면 실제로 몽골제국의 힘을 온 세계에 투사하는 것은 바로 이들이기 때문이다.

 

칭기즈칸은 죽기 전에 장남이 아닌 3남 오고타이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 이유는 조선 건국 초기 태종이 정권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장남인 양녕대군과 2남인 효령대군을 젖혀놓고 3남인 충녕대군으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하게 하는 것과 같은 이유로 비슷비슷하지만 제국경영 측면은 셋째가 제일 소질이 있다고 봤던 것.

 

제2대 오고타이칸은 유목부족의 연합체에 불과하던 몽골제국이 나라 꼴을 제대로 갖추게 했소. 중앙정부를 구성한 후 한인(漢人) 재상 야율초재(耶律楚材), 위구르인 재상 전진해(田鎭海)와 같은 전문 행정관료들로 정치기구들을 정비했다. 넓어진 제국을 통치하기 위해 속령(屬領)에 중앙에서 파견하는 통치관인 다루가치(達魯花赤)도 보냈다.  그리고 주둔군을 두어 치안유지와 세금징수도 하게 되었으니 제국다운 면모를 갖추게 된 것. 또한 수도도 세우게 된다. 오르콘 강변에 수도 카라코룸(Kharakorum 喀喇和林)을 건설하고 그곳을 중심으로 제국의 교통망을 완비해서 수도가 문화 및 교역의 중심지가 되게했다.

 

 

(오고타이칸 - 오고타이가 순조롭게 황제권을 승계한 것은 칭기즈칸의 장남인 주치의 양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치는 정치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순순한 전사로 기억되고 있다)

 

이 오고타이칸 때부터 몽골제국과 우리의 인연이 시작되는 것. 오고타이는 1231년 휘하의 장군 살리타(撒禮塔)에게 대군을 주어 고려를 침공하게 하였고 이듬해인 1232년부터 다루가치를 파견해서 내정간섭을 시작했다. 이 지점이 우리와 몽골의 질긴 인연의 시작이다.

 

(제2대 오고타이칸 때 건설된 카라코룸 유적: 사찰 유적)

 

 

(카라코룸의 건물 유적- 카라코룸은 제5대 칸때 수도가 지금의 북경으로 옮겨지면서 점차 수도로써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자. 허허벌판에 세워진 큰 성읍이었다)

(카라코룸 유적 - 궁궐의 주춧돌 잔해)

 

한편 선대인 칭기즈칸 때 추진하지 못했던 동유럽 원정도 실시하는데, 자기 형인 칭기즈칸의 장남 주치의 큰아들 바투(Batu)를 총사령관으로 해서 1236년에 원정을 떠나도록 지시한다. 이 바투의 원정군이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오고타이칸은 자신도 원정길에 나서 금나라를 정복하던 도중 병사하게 되는데 황제권은 자연스럽게 혈통을 따라 오고타이의 장남 구유크에게 넘어갔다. 그런데 제3대 칸 구유크가 집권한지 불과 3년 만에 사망함으로써 황후의 섭정이 시작되는데 이때부터 이야기가 복잡해진다.

 

정상적이라면 권력은 제3대 칸인 구유크의 장남 카이두에게 넘어와야 했지만 칭기즈칸의 4남인 툴루이의 아들들에게 권력이 이양되고 말았디. 카이두는 자기 할아버지인 제2대 오고타이칸의 지시를 받고 서방원정길에도 따라갔는데 자신의 몫이 되어야 할 칸의 자리가 작은 어버지들에게 넘어감으로써 큰 불만을 갖고 그 다음 스토리는 뻔하지만 나중에 반란까지 일으키게 된다. 

 

칭기즈칸의 3남이던 오고타이가 죽고나서 칭기즈칸의 장남인 주치의 자손들과 3남 오고타이의 자손들 사이에 권력투쟁이 본격화된다. 그런데 이 권력투쟁은 서방원정군을 이끌었던 바투가 자신과 원정을 함께했던 카이두가 아닌 칭기즈칸의 4남 툴루이의 장남 몽케로 하여금 대통을 잇게 함으로써 교통정리가 되었다. 이로써 권력은 칭기즈칸의 장남의 가문도, 칭기즈칸이 직접 후계자로 임명한 3남의 가문도 아닌 4남 툴루이의 가문에서 이어지게 된다.

 

한편 툴루이의 장남으로 제4대 칸이 된 몽케는 자신의 셋째 동생인 훌라구에게 바그다드를 점령해서 이슬람의 압바스왕조를 정복할 것을 지시하는데 우리가 전편에서 살펴본 바그다드 점령의 주인공이 바로 이 훌라구였다. (몽골군의 바그다드 점령은 시기적으로 이번에 이야기할 동유럽 정복 이후의 일이다)

 

몽케는 각각 셋째 동생인 훌라구에게는 이슬람을, 둘째 동생인 쿠빌라이에게는 남송을 점령하게 했다. 그런데 몽케가 남송(南宋) 원정 중에 사망하고나서 수도 카라코룸에 남아있던 넷째 동생 아리구가 정권을 차지하려고하자 둘째인 쿠빌라이가 급거 귀국, 두 사람 사이에 치열한 권력투쟁이 벌어진다. 이슬람 원정길에 나섰던 셋째 훌라구는 멀리서 그 소식을 듣고 권력 때문에 피를 흘리는 형과 동생에게 환멸을 느껴 "�!"하고는 원정지에서 눌러앉아 버린다. 그가 귀국하지 않고 세운 나라가 일칸국이 되는 것.

 

한편 양자의 권력투쟁에서 수세에 몰린 아리구와 그의 지지세력들은 제2대 오고타이칸의 손자인 카이두를 칸으로 추대하고 본격적으로 쿠빌라이와 맞서게 된다. 킵차크칸국과 차가타이칸국은 카이두를 지지하고, 반대편에는 쿠빌라이 지지세력과 일칸국이 서게 되는데 이로써 몽골제국의 권력투쟁은 본격적으로 내전의 양상을 띠게 된다. 

 

역사가들은 일반적으로 이 내전을 몽골제국 내부에서 유목민적 전통을 보존하려던 세력과 중국 중심의 발달된 농경민족 문화에 동화된 세력 간의 충돌로 보기도 힌다. 일리가 있는 것이 쿠빌라이가 기반으로 하고 있는 지역이 지금의 몽골과 중국에 해당하는 곳이었으니까 선진 중국문명에 대한 호감과 더불어 동화되려는 욕구가 있었으라라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마치 로마제국을 침공했던 야만족들이 로마제국의 문화에 쉽게 동화되어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해갔던 것과 흡사한 상황이라고 하겠다. 중국과 멀리 떨어져있던 다른 칸국에서는 누가 뭐래도 초원에서 말 달리는 유목민의 문화와 정서를 쉽게 버릴 수가 없었으리라는 것도 불문가지다.

 

어쨌든 양 세력간의 투쟁에서 최종적인 승자는 쿠빌라이였다. 그는 몽골에서 멀리 떨어진 서방세계의 점령에는 관심이 없었고 대신 중국의 완전한 점령에 몰두했다. 그는 수도를 카라코룸에서 연경(燕京 지금의 北京)으로 옮기고 이름을 대도(大都)라고 한 후, 1271년 [역경(易經)]에 나오는 “大哉乾元”을 따서 국호를 대원(大元)이라 정했다.

 

이것이 바로 원나라로 이후 남송을 점령하고 이민족으로써는 최초로 중국 통일을 이룬다.(1279년)

 

(원나라의 창시자 쿠빌라이칸과 그의 아내)

 

원나라를 세우고 중국왕조의 정통 계승자를 자처한 쿠빌라이는 몽골제국의 정통성 또한 자신에게 있으므로 차가타이칸국, 오고타이칸국, 일칸국 또한 자신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우겼는데 당근 다른 칸국들의 강력한 반발을 샀다. 그리고 이것은 몽골제국이 칭기즈칸 사후 구심점을 잃고 분열하게 되는 근본적인 이유가 되는 것이다.

 

이 쿠빌라이는 고려와도 인연이 깊은데 고려를 부마국으로 삼아 고려의 왕들이 세자 시절 원나라에 와서 볼모로 있도록한 장본인이다. 원나라를 세운 1271년, 당시 세자이던 고려의 충렬왕을 불러들여 자신의 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와 강제로 결혼 시키는데 이때부터 원나라와 고려왕실의 피가 섞이게 된다. 그리고 꼭 왕실만 피가 섞였겠는가? 고려시대 몽골군 주둔 병력이 얼마인데 말이다. 우리나라 아기들의 엉덩이에 나는 푸른 몽고반점이 대충 지난 역사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전성기의 몽골제국 - 위에서 언급한 칸국들이 원나라와 더불어 잘 나타나 있다.)

 

출처 : http://blog.naver.com/isky2002/20005052649

출처 : 목련꽃이 질때
글쓴이 : 어린왕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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