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곡:내 안에 흐르는 눈물(김호남 대금)
명화가 알려주는 사고력의 비밀
이중섭이 소와 아이들을 주로 그렸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모든 화가들이 초상화와 같은 정밀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모네가 빛의 움직임을 포착할 수 있었던 비결은? 이중섭, 모네, 달리, 샤갈, 아르침볼도, 밀레, 마네 등 미술사를 장식한 일곱 명의 화가와 그들의 그림을 설명해주는
<명화가 알려주는 사고력의 비밀>이 그 비밀을 전해줍니다! 출처:웹사이트
장승업이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고는 하나 처음 그림을 그릴 때에는 누구에게 배웠을 것으로 보이는데, 장승업의 초년의 스승이었다고 전해지는 화가로서 혜산 유숙(蕙山 劉淑, 1827∼1873)이 있다. 유숙은 이한철(李漢喆, 1812∼1893 이후), 백은배(白殷培, 1820∼1900) 등과 함께 19세기의 대표적 화원으로서 장승업보다 16세 연장이었다. 유숙은 산수, 인물, 화조 등 여러 소재에 능했고 풍속화도 몇 점 남겼는데, 그의 산수화나 화조화 중의 일부에는 장승업의 초기 작품과 화풍상 유사한 면이 있어 전해지는 말이 어느 정도 근거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유숙의 화풍은 정형화된 남종화풍 위주였으므로, 장승업이 후기에 이룩한 독창적이고 파격적인 화풍과는 상관이 없고, 주로 초년의 회화수업에 도움을 주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한편 고아 장승업이 한양으로 흘러 들어와 유명한 화가가 되기까지 큰 도움을 주었다고 전하는 인물로, 위에서 살펴본 이응헌 이외에 한성판윤을 지낸 변원규(卞元圭, 1837∼1894 이후)가 있다. 김용준의 『근원수필』에 의하면 장승업은 초년에 한성판윤 변원규의 집에서 고용살이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김용준 이후의 여러 사람들이 장승업에 대해서 쓴 글들에서는 이응헌 보다도 변원규의 이름이 더 자주 등장하게 된다. 이것은 이응헌 보다도 변원규가 훨씬 유명한 사람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즉 변원규는 구한말의 역관으로서 중국 청나라와의 외교업무에 깊이 관여하여 고종의 신임을 얻고, 후에 중인으로서는 하기 어려운 한성판윤 벼슬을 여러 차례 역임하게 된 인물이다. 그래서 『고종순종실록』에도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고종순종실록』에 의하면 변원규가 외교 교섭 관계로 청나라를 왕래한 것이 44세 떼인 1880년부터이며, 또 5년 후인 1885년에 49세의 나이로 처음으로 한성판윤에 임명된다. 이때는 장승업의 나이도 43세의 장년기로 이미 화가로서 명성을 드날리던 시기이다. 따라서 한성판윤 변원규는 장승업의 초년기 후원자로서보다도 후년기의 유력한 후원자였을 것으로 보인다. 변원규도 이응헌처럼 서화 감상과 수집 취미가 있었으며, 당시 중인 출신 문예계 인사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는 김석준의 『홍약루회인시록(紅藥樓懷人詩錄)』 상권에 다음과 같이 실려있다.
빛나는 보검과 같은 시의 격조, 명사도 의연히 한 수 양보해야 하리,
하늘과 땅의 맑은 기운을 받아 지녔으니, 그대의 신령스러운 지혜 몇 생애에서 닦았는가.
장승업은 일찍이 놀라운 기량과 호방한 필력으로 큰 명성을 날렸다. 그런 장승업의 명성은 궁중에까지 들려 고종(高宗) 임금이 불러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그러나 장승업에게는 임금의 부름도 크나큰 영광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로운 창조에 있어서 구속으로 느껴져 궁궐에서 도망치게 된다. 장승업과 고종에 대한 이야기도 장지연의 『일사유사』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그런데 장승업의 명성이 궁중에까지 들리니, 고종 임금이 불러 들이라 명령하여 궁중에 조용한 방을 마련해주고 병풍 십수첩(十數疊)을 그리게 하였다. 그리고 미리 궁중의 음식을 감독하는 자에게 지시하여 술을 많이 주지 못하게 하고, 하루 두어 번 두세 잔씩만 주도록 하였다. 열흘이 지나자 장승업은 술 마시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여 달아나고자 하였으나 경계가 엄중하므로, 문지기에게 그림 물감과 도구를 구하러 간다고 속이고 밤중에 탈주하였다. 고종이 이를 듣고 잡아오게 하여 더욱 경계를 엄중히 하고 그 그림을 완성시키게 하였다. 그러나 장승업은 또다시 자기의 의관 대신 금졸(禁卒)의 의복을 훔쳐 입고 달아나기를 두 세 번에 이르렀다. 마침내 고종이 화를 내어 포도청에 명령하여 잡아 가두도록 하였는데, 그때 마침 충정공(忠正公) 민영환(閔泳煥, 1861∼1905)이 고종을 곁에서 모시고 있다가 아뢰기를, "신이 본래 장승업과 친하오니 저의 집에 가두어 두고 그 그림을 끝내도록 분부해 주시기를 간청하옵니다"하니 고종이 허락하였다. 민영환 공은 바로 사람을 시켜 이런 뜻을 장승업에게 설명해주고, 자기 집으로 데려다가 의관을 벗겨 감추고 별실(別室) 안에 처소를 정해주었다. 그리고 하인에게 빈틈없이 감시하는 동시에 매일 술대접을 잘 하되 다만 너무 많이 취하지 않도록 하였다. 민영환 공이 이처럼 대우해주니 장승업도 처음에는 감사하는 마음이 들어 차차 정신을 차리고 조용히 앉아 그림에 전념할 듯 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 민영환 공이 입궐하고 감시하는 하인이 잠깐 자리를 비우자 장승업은 다시 다른 사람의 모자와 상복(喪服)을 바꿔 입고 술집으로 달아나 버렸다. 민영환 공은 여러 차례 사람을 시켜 장승업을 찾아 잡아 왔으나 끝내 그 일을 마치지 못하였다.
위의 일화는 장승업의 진정한 예술적 기질, 즉 일체의 세속적인 가치와 법도는 그에게 있어서 하찮은 것이었고, 오직 예술과 창작의 영감을 북돋아주는 술만이 전부였다. 그런 진정한 예술혼이 있었기에 그의 파격적인 행동에도 민영환 같은 분의 지우(知友)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위의 궁중에서의 일화는 대개 40세 경의 일이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민영환이 고종을 가까이 모신 시기는 대략 그가 당상관으로 승진하여 동부승지가 된 1881년 이후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장승업은 40대에 이르러 가장 왕성한 창작력을 발휘하는 동시에 그림에도 원숙한 경지에 도달한 듯 하다. 이점은 현재 전하는 기년작(紀年作)들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리고 김용준의 『근원수필』에 의하면 장승업은 40세가 넘었을 때 오경연(吳慶淵)의 집을 드나들기 시작하여 중국 그림을 많이 보게 되고, 이것이 새로 기명절지도를 그리게 된 동기가 되었다 한다. 오경연은 조선말기의 유명한 정치가이자 서화가였던 오경석(吳慶錫)의 네 번째 동생으로서,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昌)의 숙부이기도 하다. 오경연은 형과 마찬가지로 서화를 좋아했으며 고람 전기(古藍 田琦)에게 산수화를 배우기도 했다고 한다. 오경연은 중국을 자주 왕래했던 집안 내력상 당시 새로 수입된 중국화를 많이 수장하고 있었을 것이며, 이것이 장승업의 창작에도 많이 참조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일사유사』에 의하면 장승업은 또 40여 세에 부인을 맞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장승업에게 있어서 가정생활도 구속으로 여겨져 하룻밤을 지낸 후 다시 돌보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김용준의 『근원수필』에 의하면 장승업이 관수동(觀水洞)에 작은 집을 두고 왕래하였으며, 이 집이 장승업이 죽은 후에는 원남동(苑南洞) 부근으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또 장승업의 관수동 소실(小室)의 이름이 박성녀(朴姓女)이며 원래 기생이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조석진과 안중식이 동대문 밖 멀리 조그만 집에 거주하던 장승업의 부인을 방문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어쨌든 이런 이야기들은 장승업의 자유분방한 성격을 잘 보여주며, 그의 후손이 없는 이유도 설명해 준다.
조석진, 안중식과 비공식적 사제관계를 맺은 것도 같은 대략 40대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조석진과 안중식은 1881년 영선사를 따라 기계제도를 익히러 중국 천진에 1년간 다녀온 후부터 본격적으로 화가로서의 활약을 시작하는데, 이때가 장승업의 40대 초반에 해당한다.
조석진과 안중식은 당시 큰 명성을 날리던 장승업을 흠모하여 스승으로 사숙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안중식이 장승업을 스승으로 대한 점은 그가 장승업의 <삼협도(三俠圖)>(간송미술관)에 쓴 제발(題跋)에서 "일찍이 신묘년(1891) 봄에 육교화방(六橋畵舫)으로 오원 선생을 방문하니, 선생은 마침 이 그림을 그리고 계셨다"라고 한 점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석진, 안중식과 장승업 사이의 관계는 정식 사제 관계라기보다는, 두 사람이 스스로 좋아서 장승업을 스승으로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궁중에서의 그림 일도 구속으로 여기고 가정 생활도 돌보지 않던 장승업이, 정식으로 제자를 두고 가르쳤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장승업의 술을 좋아하는 성품과 기행(奇行)에 대해서는 『일사유사』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성품이 술을 목숨처럼 좋아하여 두어 말을 거뜬히 마시되 만취하지 않으면 그치지 않았다. 또 취하면 간혹 한 달이 되도록 깰 줄을 몰랐다. 그러한 이유로써 매양 그림 한 축을 그리려면 가끔 절반만 그리고 걷어치우는 일이 많았다. 또 그림 값으로 받은 금전(金錢)은 모두 술집에 맡겨두고 매일 가서 마시되, 그 금전이 얼마인지 계산도 하려 들지 않았다. 술집에서 "돈이 다 떨어졌다"고 하면, "나에게 술대접이나 할 따름이지, 돈은 물어서 무엇 하느냐"고 하였다.……… 성품이 또 여색(女色)을 좋아하여 노상 그림 그릴 때에는 반드시 미인을 옆에 두고, 술을 따르게 해야 득의작(得意作)이 나왔다고 한다.
장승업의 기행(奇行)은 어떤 행동 그 자체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예술을 향한 순수한 열정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세속적인 권위와 명성, 그리고 금전과 행복 따위를 포기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예술의 경지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술을 좋아한 것은 술을 통해 현세를 잊고 예술적 영감의 세계로 비상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뛰어난 예술가와 술과의 관계는 장승업 이외에도 역사상 많은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장승업의 생애는 술과 예술, 그리고 방랑으로 일관되었다고 할 수 있다. 임금의 명을 받드는 궁중 화사(畵師)로서의 명성도, 그림의 대가로 받은 금전도, 가정생활도 모두 그에게는 구속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술집과 그림을 부탁하는 사람들의 사랑방을 전전하며 생활하였다. 당시에 장승업의 그림을 구한 사람들은 위로는 왕과 고위 대신들로부터 아래로는 중인, 장사치, 부호 등 아주 많았다. 그러나 장승업의 그림을 구하려면 권위나 금전보다도 좋은 술과 인격적인 대우가 필요했다. 장승업은 아름다운 여인이 따라주는 좋은 술을 실컷 마시고는 취흥이 도도한 가운데 기운 생동하는 명화들을 그려냈다.
장승업에게 그림을 주문했던 후원자들 중 일부는 지금 전하는 장승업의 작품에 적힌 제발(題跋)이나 관서를 통해 알 수 있다. 앞에서 언급했던 일화에 나오는 바, 고종 임금의 명령에 의해 그려진 그림들 중 일부도 현재 전한다. 즉 간송미술관 소장의 <신선도> 2폭에는 "임금님이 명령을 받들어 신 장승업이 그려 올립니다"라는 관서가 있다. 이 그림을 통해 장승업이 궁중의 그림 일을 모두 마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여러 점을 그려 받쳤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음으로 고종의 노여움 속에서 장승업을 구해준 민영환 공에게도 많은 그림을 그려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세간에는 민충정공 집안의 구장품이라는 장승업의 작품이 몇 점 전하며, 또 같은 여흥 민씨 집안을 위해서도 많은 그림을 그려주었음이 확인된다. 그 중에는 민영익(閔泳翊, 1860∼1914)의 생부(生父)로서 사대당의 핵심인물이었던 민태호(閔台鎬, 1834∼1884)에게 그려준 그림도 있다. 즉 선문대 박물관 소장의 <무림촌장도(茂林村庄圖)>와 서울대박물관의 <국석도(菊石圖)>, 그리고 순천제일대학 소장의 <연화도(蓮花圖)> 등이다. 이중 <국석도>와 <연화도>는 원래 한짝(對聯)이다. 또 장승업이 판서 민영달(閔泳達, 1859∼?)에게 그려준 <파조귀어도(罷釣歸漁圖)>, 그리고 민영달이 좌의정을 지낸 김병시(金炳始, 1832∼1898)의 회갑을 축하하기 위해 장승업에게 주문한 <어옹도(漁翁圖)> 등도 전한다. 장승업이 우의정 정범조(鄭範朝, 1833∼1898)를 위해 그려준 <산수도>도 『한국회화대관』에 실려있다.
이밖에도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 1846∼1922), 석운(石雲) 권동수(權東壽, 1842∼?), 유복열의 부친 난사(蘭史) 유병각(劉秉珏), 오경석, 오경연 형제 등을 비롯하여 지금은 알 수 없는 당대의 수많은 사람들이 장승업의 예술을 아끼고 사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장승업에게는 이들의 사랑방과 술집이 바로 자기 집이었던 셈이다.
오직 술과 예술, 그리고 방랑으로 일관했던 장승업은 1897년 55세로 세상을 떠났다고 전한다. 그러나 장승업이 어디에서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래서 김용준은 장승업은 죽었다기보다는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하였고, 정규는 "어느 마을 논두렁을 베고 죽었다"고 하였고, 또 어떤 이는 심지어 신선이 되었다고 까지 하였다. 어찌되었든 간에 장승업의 죽음은 그가 일생을 세속적인 가치를 거부하고 오직 순수한 예술을 위해 살았듯이 죽음도 신비하게 맞은 듯 하다. 이와 관련하여 김용준은 『근원수필』에서 "오원(吾園)이 평사시에 말하기를 사람의 생사(生死)란 뜬구름(浮雲)과 같은 것이니 경치 좋은 곳을 찾아 숨어 버림이 좋을 것이요, 요란스럽게 앓는다, 죽는다, 장사(葬事)를 지낸다 하여 떠들 필요가 무어냐고 했다"라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어, 그의 생사관(生死觀)의 일단을 잘 보여준다. 장승업은 뜬구름 같은 인생에서 가치 있는 것이란 지고한 예술의 세계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이 진리를 자신의 온 인생을 통해서 실현하다가 갔던 것이다.
예술가에게 있어서의 아름다움의 추구는 철학자에게 있어서 진리이며, 종교인에게 있어 절대자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3. 암울한 시대를 밝힌 찬란한 예술혼
1) 장승업의 회화(繪畵) 개관(槪觀)
장승업의 작품은 산수화, 인물화, 동물화, 기명절지화(器皿折枝畵) 등 아주 다양하며, 이 여러 종류에서 모두 뛰어난 성취를 이루었다. 그런 중에서도 가장 많이 그린 것이 화조화, 동물화, 기명절지화이며, 산수화와 인물화는 상대적으로 적다. 장승업이 많이 그린 화조화, 동물화, 기명절지화는 형태상 병풍으로 그려진 경우가 많아 당시의 사회적 요구를 반영하고 있다.
장승업의 회화를 양식적으로 볼 때, 한마디로 전통화법과 외래화법을 종합·절충하여 자신의 세계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장승업이 활동하기 시작했던 19세기 후반, 우리 나라에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이래 상당히 형식화된 남종문인화풍(南宗文人畵風)이 유행하고 있었다. 이런 화풍을 대표하는 작가들이 도화서(圖畵署) 화원(畵員) 백은배(白殷培, 1820∼1900), 이학철(李漢喆, 1812∼1893 이후), 유숙(劉淑, 1827∼1873) 등이며, 이 중 유숙은 장승업의 초년 스승이었다고 전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때에는 그 이전, 즉 18세기의 중국 양주팔괴(楊洲八怪)의 화풍이 이미 유입되어 있었고, 또 당시 중국의 신 화풍도 수입되고 있었다. 새로 수입된 신 화풍이란 당시 번창했던 신흥도시 상해를 중심으로 발전했던 조지겸(趙之謙), 임백년(任伯年), 오창석(吳昌碩) 등 소위 해상파(海上派)와 광동성을 중심으로 발전했던 거소(居巢)와 거렴(居廉) 형제 등의 초기 영남학파(嶺南學派)의 화풍을 말한다.
그러나 장승업의 화가로서의 위대성은 어떤 한 가지 유파나 기법에 얽매이지 않고, 그 누구와도 비교되지 않는 뛰어난 기법과 양식적 다양성을 가진 독자적 경지를 이룬 데 있다. 장승업이 즐겨 사용한 기법으로는 필선의 아름다움을 잘 드러내는 백묘법(白描法), 정묘하고 아름다운 공필(工筆) 채색화법, 이와는 정반대인 호방한 필묵의 감필법(減筆法), 수묵의 깊은 맛을 보여주는 파묵법(破墨法), 근대적 감각을 보여주는 신선한 선염 담채법, 그리고 최후에 이룩한 깊은 정신미가 깃든 수묵 사의화법(寫意畵法) 등을 들 수 있다.
장승업은 조선 후기의 대화가 단원 김홍도를 의식하여 "나도 원이다"라는 뜻으로 오원(五園)으로 자기 호를 지었다. 그리고 매번 스스로 자신의 작품에는 신운(神韻)이 생동(生動)한다고 자부하였다고 한다. 이런 그의 자부심은 예술에 대한 진정한 깨달음에서 오는 내적 자신감의 표현이며, 이는 그의 뛰어난 작품들이 증명하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를 안견(安堅), 김홍도(金弘道)와 함께 한국 회화사상 진정한 대가(大家)의 반열에 자랑스럽게 내세울 수 있는 것이다. 장승업의 회화는 초월적 예술정신의 발현이자 암울했던 시대를 밝힌 찬란한 예술혼으로서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다
071011 샛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