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顚張狂素의 草書
동한의 장지로부터 ‘일필서’라는 금초가 세상에 크게 유행한 이후 왕희지와 왕헌지 부자를 거쳐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끊이지 않았으니, 초서의 발전은 줄곧 금초의 형식을 주체로 삼았다. 당나라 초서는 초당에 손과정이 있었는데, 그의 초서는 ‘이왕’의 필법을 얻었다. 미불은 그가 쓴 <서보>에 대해 “심히 왕희지의 필법이 있었고, 글씨를 씀에 다리를 조금 가까이하여 앞으로 떨어뜨리니, 이것이 손과정 필법이다.……당나라 초서는 ‘이왕’의 필법을 얻었으나 그 경지를 넘지 못했다[甚有右軍法, 作字落脚差近前而直, 此乃過庭法……唐草得二王法, 無出其右].”라고 했다. 손과정의 초서는 비록 운필이 난숙하나 가운데에 법도를 갖추었으나 끝내 ‘이왕’의 법도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밖에도 하지장(賀知章)이 있는데 초예를 잘 써 “필력은 굳세고 풍격은 고원함을 숭상하여[筆力遒勁, 風尙高遠]” 직접 왕희지의 전통을 이었고, 또한 당나라 사람의 기질을 띠고 있어 성당의 장욱과 이름을 나란히 했다. 시인 이백 또한 초서를 잘 썼는데, 지금 <상양대(上陽臺)>라는 묵적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시인 두목(杜牧)의 행초서인 <장호호시(張好好詩)> 묵적은 육조의 풍격과 운치를 깊이 얻었으며 당나라 글씨에서 아름다운 작품이다. 당나라 초서에서 창조적인 서예가는 마땅히 성당 장욱과 중당의 회소를 들 수 있다. 장욱의 초서는 ‘이왕’을 이어 위로 장지를 거슬러 올라가 명확한 독창성이 있다. 그의 글씨는 자유분방하고 구속됨이 없으며 방종한 필세는 마치 토끼가 일어나고 송골매가 떨어지듯 한 기운으로 꿰뚫어 흘러 소나기와 돌풍의 형세가 있다. 게다가 그는 성정이 이르는 작품을 했기 때문에 두보와 같은 사람은 시에서 “장욱은 석 잔 술에 초성의 칭호! 맨머리로 왕공의 앞에 나아가 붓을 잡으면 구름 안개 일어나는 듯하네[張旭三杯草聖傳, 脫帽露頂王公前, 揮毫落紙如雲烟].”라고 했다. 세칭 ‘장전(張顚)’이라 하고 그의 초서를 광초(狂草)라고 일컬는 것은 당나라 금초의 새로운 표현 형식이기 때문이다. 장욱보다 늦은 회소는 안진경과 오동(鄔彤)으로터 장욱 초서의 필법을 얻었다. 그의 초서는 마치 바람과 같고 기이한 변화와 펼침이 자유롭고 표일하면서 자연스러우며 용필은 돌풍이 불고 벼락이 치는 형세가 있어 세칭 ‘광소(狂素)’라고 한다. 회소의 초서는 광(狂)으로 전(顚)을 이어 변화를 잘할 수 있었기 때문에 역사에서 ‘전장광소(顚張狂素)’라고 일컫는다. 황정견은 “이 두 사람은 한 시대 초서의 으뜸이다[此二人者, 一代草書之冠冕也].”라고 하여 장욱과 회소가 초서에서의 성취를 긍정했다.
장욱의 자는 백고(伯高)이고 생졸년대가 자세치 않으며, 현종 개원(713-741)과 천보(742-756) 연간에 일찍이 서울에서 벼슬살이를 하여 우솔부장사(右率府長史)를 지냈고 서예로 세상에 이름나 ‘장장사(張長史)’라고 불렸다. 그의 초서는 매우 추앙을 받았으며, 『당서』 본저에 “후세 사람들이 글씨를 논함에 구양순ㆍ우세남ㆍ저수량ㆍ육간지 모두 이론이 있으나 장욱에 이르러서는 시비와 단점이 없었다[後人論書, 歐虞褚陸, 皆有異論, 至旭無非短者].”라고 했다. 장욱의 초서와 이백의 시가, 그리고 배민(裵旻) 장군의 검무를 삼절이라 일컬었고, 두보의 시에서 이미 그를 ‘초성(草聖)’이라 일컬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장욱은 “술을 즐겨 매번 크게 취하면 절규하며 미친 듯 뛰어가 글씨를 쓰는데, 혹은 머리카락에 먹을 묻혀 글씨를 쓰고는 이미 깨어나 스스로 보고 신의 도움이 있었으니 다시는 얻을 수 없다.”라고 했다. 그의 이러한 성글고 자유분방하며 구속되지 않는 성정과 태도, 그리고 그의 초서에 성정의 미친 듯 표일함을 세우는 성격이 곧 그를 ‘장전’이라 부른 원인이 될 수 있다.
장욱의 필법은 외숙부인 육언원(陸彦遠, 즉 陸柬之의 아들)에게 배웠고 ‘이왕’의 계통에서 나왔다. 해서는 <상서성낭관석기서(尙書省郞官石記序)>가 세상에 전해지는데, 필법은 정연하고 마땅히 법도에 들어가 구양순과 우세남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황정견이 이 작품을 “당나라 사람의 정서는 그 경지에서 나올 수 없다[唐人正書, 無能出其右者].”라고 평했다. 그러나 끝내 ‘이왕’ 및 구양순ㆍ우세남 이래의 규범을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옛것을 변화하여 창신한 곳이 분명하지 않다. 장욱의 서예 창조성은 주로 초서에서 나타난다. 현재 전해지는 그의 초서작품은 <두통첩(肚痛帖)>ㆍ<천자문(千字文)>ㆍ<고시사첩(古詩四帖)> 등이 있다. 한유는 「송고한상인서(送高閑上人序)」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장욱은 초서를 잘 써서 다른 기술은 다스리지 않았다. 기쁨과 성남ㆍ군색함과 곤궁함ㆍ우울함과 슬픔ㆍ즐거움과 편안함ㆍ원한ㆍ사모ㆍ취함ㆍ무료함ㆍ불평 등이 마음에서 움직임이 있으면 반드시 초서로 이를 펴내었다. 사물을 보고는, 산수와 벼랑 골짜기ㆍ새와 짐승과 벌레와 물고기ㆍ초목의 꽃과 열매ㆍ해와 달과 별자리ㆍ바람과 비와 물과 불ㆍ번개와 천둥과 벼락ㆍ노래와 춤과 싸움 등의 천지 만물의 변화를 보고는 기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한 것을 모두 하나로 글씨에 담았다. 그러므로 장욱의 글씨는 변하여 움직이면 귀신과 같아 실마리와 끝을 잡을 수 없으니 이것으로 그 몸을 다하고 후세에 이름이 났다.
張旭善草書, 不治他技. 喜怒, 窘窮, 憂悲, 愉佚, 怨恨, 思慕, 酣醉, 無聊, 不平, 有動于心, 必于草書焉發之. 觀于物, 見山水崖谷, 鳥獸虫魚, 草木之花實, 日月列星, 風雨水火, 雷霆霹靂, 歌舞戰鬪, 天地萬物之變, 可喜可愕, 一寓于書. 故旭之書, 變動猶鬼神, 不可端倪, 以此終其身而名後世.
이를 보면, 장욱 초서의 새로운 풍격 창조는 그가 대자연에 대한 감수와 체득에서 기초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일찍이 스스로 “공주의 가마꾼이 길을 다투는 것을 보고, 또한 고취곡을 듣고 필법의 뜻을 얻었다. 그리고 공손씨의 검무를 보고 그 정신을 얻었다[見公主擔夫爭道, 又聞鼓吹而得筆法意. 觀公孫氏舞劍器而得其神].”라고 했다. 이를 보면, 그는 멀리 사물에서 취하고 가깝게는 몸에서 취해 천지만물의 정세와 자신의 주관적 정태를 하나의 형체로 융화하여 뜻에 맡기고 성정을 멋대로 하여 점과 획을 깃들여 그의 비동하고 호탕한 ‘광초’의 표현 형식과 풍격을 주조해서 독특한 초서 예술 형상을 창조했음을 알 수 있다. 장욱의 초서는 필법의 표현력이 풍부하여 직접 안진경의 서예 변혁에 영향을 주었고, 당나라 서예 발전을 추동하는 것에 대해 걸출한 공헌이 있었다. 전하는 그의 <고시사첩>은 광초의 대표작으로 용필은 내엽법과 외탁법으로 천변만화를 다했고, 강하고 부드러움이 서로 어울리며, 사로잡고 놓아줌을 결합하여 침착하고 굳세며 호매하여 구속됨이 없으며, 솜처럼 이어져 얽히고 돌며 또한 리듬이 선명하고 선의 변화 형태가 매우 풍부하다. 이는 마치 미불이 “마치 신비로운 규룡이 하늘로 올라가고, 여름 구름이 산굴에서 나오는 것과 같이 표일한 기세와 기이한 형상을 헤아릴 수 없다[如神虯騰霄, 夏雲出岫, 逸勢奇狀, 莫可窮測].”라고 말한 것과 같다. 추상적인 점ㆍ획ㆍ선이 무르익고, 그의 호탕하고 기쁜 사상과 정감을 표현했다. 장욱의 초서는 이미 소나기와 돌풍의 형세가 있고, 또한 법도가 근엄했다. 안진경은 일찍이 “장욱은 비록 성품이 방자하고 미친 듯하나 서예는 매우 법도를 들였다[張長史雖恣性顚佚, 而書法極入規矩也].”라고 했다. 또한 황백사(黃伯思)는 『동관여론(東觀餘論)』에서 “마음을 따르더라도 법도를 넘지 않았고, 망령된 행동이나 대범함을 따랐다[從心而不踰規矩, 妄行而蹈乎大方].”라고 했다. 이러한 것들은 근본이 박약하고 공력이 얕고 비루하며 사납게 날뛰는 작태의 글씨와 더불어 같이 논할 수 없다. 이는 장욱이 역대 서예가로 추앙 받고, 초서로 그 몸을 다하여도 후세에 이름을 남긴 중요한 원인이다.
회소(懷素, 725-785)의 자는 장진(藏眞)으로 본래 현장법사의 제자였으며 속성은 전(錢)이다. 어려서 집이 가난했지만 서예를 매우 좋아하여 일찍이 만 그루의 파초를 심어 파초 잎사귀에다 글씨를 연습했고, 또한 옻칠한 소반에 글씨를 연습하기도 했다. 이를 보면, 서예에 몰두하여 각고의 노력으로 학습한 정신을 알 수 있다. 회소는 일찍이 안진경과 오동(鄔彤)에게 필법의 가르침을 청했다. 현재 전해지는 육우(陸羽)의 『회소별전(懷素別傳)』 중에서 「석회소여안진경논초서(釋懷素與顔眞卿論草書)」라는 글을 보면, 회소가 안진경과 오동으로부터 장욱의 초서 필법을 얻었음을 알 수 있다. 당나라 대력(大曆, 766-779) 연간에 어사인 이주(李舟)가 회소 초서를 “옛날 장욱의 작품을 당시 사람들은 ‘장전’이라 불렀다. 지금 회소가 하는 것도 나는 실로 미친 스님이 미친 것으로 미친 것을 이은 것이라 함에 누구 불가하다고 말하겠는가[昔張旭之作也, 時人謂之張顚, 今懷素之爲也, 余實謂之狂僧, 以狂繼顚, 誰曰不可]!”라고 평했다. 미친 것으로 미친 것을 잇는다는 것은 회소 초서가 장욱 광초의 혁신적인 길을 이어서 앞으로 나아갔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동유(董逌)는 『광천서발(廣川書跋)』에서 “서예를 서로 전함이 장욱에 이른 뒤에 안진경은 해서에서 다하였고, 회소는 초서에서 다했다. 안진경은 미친것으로써 미친것을 얻었다는 것을 이르러 바로 스승으로부터 원류를 이어받은 것을 논한 것이다[書法相傳至張顚後, 魯公得盡于楷, 懷素得盡于草. 魯公謂以狂繼顚, 正以師承源流而論之也].”라고 했다. 이를 보면, 당나라 서예는 옛것을 변화시켜 창신한 새로운 서예 풍격의 전후관계를 알 수 있다.
회소의 초서는 체세를 겸비했고, 용필은 미치고 방종하며 순전히 자연에 맡겨 미친 가운데 법이 있으니, “비록 법도를 달리는 이외에 돌고 에워싸면서 나아가고 물러남에 절도에 맞지 않음이 없다[雖馳騁繩墨外, 而廻旋進退, 莫不中節].” 현재 회소의 초서 묵적은 세상에 전해지는 3작품이 있다. <논서첩(論書帖)>은 ‘이왕’의 초서 필법을 본받아 “법도를 넘나들며 광적이고 괴이한 형태가 뛰어났다[出規入短, 絶狂怪之形].” 이 첩을 보면, 회소가 일찍이 ‘이왕’의 초서 전통을 엿보아 들어갔음을 알 수 있으니, 이는 회소 초서 원류의 하나이다. 그의 <고순첩(苦笋帖)>과 <자서첩(自敍帖)>은 독창성이 많고 종횡으로 달리며 ‘미친 것으로써 미친 것을 잇는[以狂繼顚]’ 것에 속한 창조성이 풍부한 유형의 하나이다. 고복(顧復)은 『평생장관(平生壯觀)』에서 이러한 유형의 작품은 대부분 “봄 지렁이와 가을 뱀의 뜻이 있어 변화의 실마리를 잡을 수 없다[有春蚓秋蛇之意, 變化不可端倪].”라고 했으니 가히 평정함에서 질적 변화를 한 것이라고 하겠다. 회소와 안진경이 초서를 논한 글에서 이러한 유형의 작품 내력이 나타난다. 안진경이 “선생 또한 스스로 얻은 것이 있으십니까[師亦有自得乎]”라고 물으니, 회소는 “나는 여름 구름에 기이한 산봉우리가 많은 것을 보고 문득 이를 스승으로 삼았다. 그 통쾌한 곳은 나는 새가 숲에서 나오고, 놀란 뱀이 풀에 들어가는 것 같다. 또한 터진 벽의 길이 하나하나가 자연스럽다[吾觀夏雲多奇峰, 輒常師之, 其痛快處如飛鳥出林, 驚蛇入草. 又遇坼壁之路, 一一自然].”라고 답했다. 전통 이외에 대자연의 순식간적인 천변만화의 계시는 회소 초서가 탈화하는 관건이다. <고순첩>의 용필은 마치 실오라기가 공중에서 놀며 하늘하늘 날아 움직여 둥글게 전환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의 <자서첩>은 얌전하고 쫓기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느리게 표일함을 펼쳐 바람을 불고 번개가 빠르게 치는 것처럼 진입하여 순식간에 천변만화를 다하여 붓 닿음에 생동한 형상이 나타나고 또한 차례대로 다할 수 없는 경지를 이루었다. 전체적으로 리듬이 생동하고 활발하며, 확실히 여름 구름에 기이한 봉우리의 자태가 있다. 회소와 장욱 초서를 서로 비교하면, 각각 특색을 갖추고 있는데, 이에 대해 황정견은 “회소 초서는 만년에 장욱보다 덜하지 않았으니, 대개 장욱은 살짐에 묘했고, 회소는 마름에 묘하여 이 두 사람은 한 시대 초서의 으뜸이다[懷素草書, 暮年乃不減長史, 蓋張妙于肥, 藏眞妙于瘦, 此兩人者, 一代草書之冠冕也].”라고 했다. 초서 발전사에서 장욱과 회소는 두 개의 찬란한 별로 그들은 초서에서 얻은 고도의 성취는 서예사에 광채를 더했다.